1. 바람이 전하는 말 / 김용태
하현달 아래서였습니까
이별은 아직 일러
추억으로조차 잉태되지 못해
여기 까지가 緣인것 같다고,
어설픈 인사 대신
묻지도 않은 답을 건네고
휘청이며 돌아오는 길에
여름꽃 한창입니다
뒤돌아보면
내 걸어온 길이
저 혼자 방향 틀어
멀어져 가듯, 이 밤도
당신은 읽히지 않을 편지를
근심 가득 찬 허공중에 쓰실 것입니다
지난날,
절집 처마 끝에 매달려
동그란 울음 토할 때
내 곁을 스쳐 지났던 바람도
당신이었습니까
2. 내 생의 북쪽 / 김용태
싸리꽃 피었다, 졌다
봄이 갔다는 거다, 불쑥
다녀간 것이
계절만은 아니어서
그 아래
한 마리 나비,
환한 주검 펼쳐져
검은 상복 갖춰 입은
개미 행렬에
장엄히 실려가고 있다
한철도 못 되는 생이지만
죽음이라 하면
저쯤은 되어야지,
혈육도 아닌 것을
쪼그리고 앉아
내 생의 북쪽을 가만히
들여다본
그런 날이 있었다
3. 한참을 바라보다가 / 김용태
경전 읽듯, 자벌레 한 마리
나뭇가지에 매달려, 곡진히
또 한생을 건너고 있다
한껏 몸을 늘였으나
곧, 분수를 헤아렸음일까
한 치도 안 되는 거리를 곱씹어 갔다
한참을 바라보다가
내 먼 훗날
기억마저 흐리고
정신 또한 먼 세상을 살아
누구인지도 알아보지 못할 당신,
당신 만나러 가던
그 길, 그 일만은 기억에 남아
불현듯
버릇처럼 나선 길이
저리도 환했으면, 부디
꿈처럼 환했으면
4. 면회 / 김용태
가끔씩
다음 생이라도 다녀오시는지
그곳의 삶 또한 빈궁했던 것일까,
어머니는 먹을 것만 찾으신다
오늘은
온전한 어머니와 한나절을 보냈다
그의 기억과 내 기억을 포개어
눈 맞추고 울고 웃다
애써 돌아 나오는 길
다시
후생의 문턱을 더듬고 계신 걸까
아저씨, 또 오라는 말씀
꽃물 가득 번졌다
5. 감자 / 김용태
아버지도 묻지 않으셨다
쫓기듯, 어머니는
영글지 않은 감자를
삶아 내시고
그날 밤
여섯 식구는
부황든 몸을 눕히고
오랜만에 긴 잠을 잤다
등굣길
이장집 감자밭
시든 줄기,
더운 눈물 매달고 있었다
6. 관음암, 공양주 보살은 / 김용태
穀酒 (곡주) 는 싱거우니
그만 소주를 내오라고,
어림잡아 예순이나 되었을까
여자는 다시 잔을 채우더니
안주 대신 유행가 한 자락을
목 쉬어라 불러 잦혔다
방구석에 들어앉아
뭐를 깨친다는데
깨칠 것이 그리 없으면
공양간 뒤꼍 얼음장이나
깨줄 것이지,
다 부질없는 짓거리라고
손사래 치며
고개를 安居 (안거) 중인 절 (寺) 로 향했다
취기가 올랐는지 여자,
팔 접어 머리 밑에 괴고 모로 눕는다
고운 목線 (선) 위로
산 그림자가 내려와 덮히고
어미를 찾는 소리 있었던가,
따라나온 개가 쫑긋
산쪽으로 귀를 세웠다
업힌 등에서 아직 식지 않은
노래 한 소절을 끌며 절집으로 가는
그녀
한때
시를 썼다던가, 그림을 그렸다던가
7. 托鉢 (탁발) / 김용태
세 찬 비 뚫고 衲子 (납자), 탁발입니다
문 밖 저만치
나즉히 읊조리는 반야심경은
비릿한 綠豆 (녹두) 향입니다
주름진 얼굴에서 설핏 그리운 모습 스쳐 보이고
자꾸만 몸집 키워
뜨거운 것 울컥 솟아, 그만 또 눈물입니다
거친손 모으고 돌아서는 노스님 뒤엔
그림자 마저 아니 보이고
야윈 어깨에 빈 바랑만 위태로이 걸렸습니다
난 괜히 한참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
오래된 어느 절집을 쓸쓸히 생각합니다
8.솟대 / 김용태
푸석돌처럼 메마른
모질지 못 한 그 가슴에
밤하늘 은하 (銀河) 한줄기 애써 돌려
흐르게 만 해준다면
봄 되어 억새 풀, 언 발치에서 움이 트듯
천애 (天涯) 고도 (孤島)에 유배된
기억 하나 쯤은 되살려서
퇴화된 날개 펴고 내게로 다시 올 것인가
잊혀진 것들과
잊어야 하는 것들의 사이 쯤에서
한참을
한참을 서성이다
종래 화석이 되어 버린
저,
먼 응시 (凝視)
9. 하안거 (夏安居) / 김용태
나가지 않겠음인가,
들어오지 말라 함인가
소를 찾는 이의 어깨에
쏟아지는 죽비소리다
비움이 곧 채움이라,
풀지 못할 매듭 붙잡고
심지처럼 야위고 있을
그를 짐짓 알 것도 같은데
빗소리 멧비둘기 울음
오소소 쏟아져 내리는
처마 밑 경계에서, 낯선
그림자 하나 젖고 있는 걸
저 안에선 알고 있을까
돌계단에 걸쳐논 대나무,
무겁게 승속을 가르고 있다
10. 石榴 / 김용태
나,
꽃이었을 때만 좋으셨나요
다시 사랑해 줄 수 없냐는 물음에, 당신
나는 이미 타락한 神이거늘,
마음 밖의 말로 답 주시니
가을 한낮
이 가슴 깨고 나올 것들에게는
누구였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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